노빠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99세. 사람들은 그 나이면 호상이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자식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 이별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못한다.
아버지는 끝까지 아버지였다.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가발을 찾았고, 기미가 보인다며 스틱 파운데이션을 챙겼다. 죽으면 본드로 가발을 붙여서 묻어라.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흐트러진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그 나름의 자존심이었다.
평생 그랬다. 기준이 분명했고, 목소리는 컸다. 맛있는 것, 좋은 것, 옳다고 믿는 것. 가족의 형편이나 마음보다 당신의 잣대가 먼저였다. 우리는 그 곁에서 종종 위축됐고, 섭섭함도 쌓였다.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나는 착하게 살아서 오래 산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남겨진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몇 해 전, TV를 보다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가족들끼리 참 다정하더라. 나는 먹고 산다고 너희에게 정을 못 줬다.
그게 아버지식 사과였다는 걸 이제야 안다.
손자를 향한 마음은 각별했다. 마지막까지 손자 이야기를 했고, 손자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아버지가 그리워한 것은 집이었다. 익숙한 방과 음식, 늘 앉던 자리.
요양병원은 정성껏 돌봐주는 곳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마음 붙이고 사는 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곳에서도 아버지는 끝까지 체면을 놓지 않으려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나는 5만원권 지폐를 쥐어드렸다. 병동에서 일하는 분들께 그동안 수고했다는 뜻으로 전하시라고.
아버지는 아이처럼 좋아하시며 한 사람씩 건넸다. 누군가 두 번 받으려 하자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끝까지 정확하고 분명했다. 그 모습이 아버지다워 우리는 잠시 웃었다.
임종을 앞두고는 자기를 돌본 간호사에게 돈을 주라고 했다. 그리고 펜과 종이를 찾았다. 무엇을 쓰려 했는지 끝내 알아보지 못한 글씨가 지금도 내 마음 안에 남아 있다.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표현에는 서툴렀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생 자기 방식대로 밀고 나간 사람. 노빠꾸. 그게 아버지였다.
이제는 가발도, 체면도 필요 없겠지. 본드를 찾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편안해지셨기를 바란다.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한 아버지의 외로움까지 그곳에서는 내려놓으셨기를.
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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