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그렇듯 가끔씩 어머니 생각이 난다. 먼 길 떠나신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이북 영변 근처가 고향이셨던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울릉도로 피난 가셨다. (그 덕택에 나도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 거기서 피난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를 만나 육지에서 아는 이 없이 작은아버지 댁에 얹혀 사셨다.
그런데 자리잡지 못한 아버지로 인해, 그리고 언혀 사는 입장으로 인해 눈치을 보고 사시면서 억눌리셨던 것 같다. 특히 타인에게 무척 관대하면서도 우유부단한 아버지의 성격으로 내가 중학교 때까지도 부부싸움이 잦았다.
그러다가 본인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고혈압, 당뇨가 오면서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자식이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부분이 컸다.) 가끔씩 병원비 결재하면서 보는 모습은 항상 눈을 감으신채 가만히 누워 계신 것이었다. 당뇨가 심해 눈이 잘 안보이고 신장까지 안좋아 지면서 투석을 받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몸이 더이상 버텨내지 못한 것인지, 어머니는 곡기를 끊고 마무리를 하신 것인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다고 연락이 오고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먼 길 가신 것이다.
그날 어머니가 이전에 시신기증을 서약했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관련 기증병원에 연락하자, 관계자가 와서 간단히 예를 표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그것이 장례가 생략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신 결벽, 타인에게 민폐를 주고 싶지 않은 단호함, 그래도 사회에 도움이 되고싶다는 소망, 이런 것들이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이었다.
기증병원에서 연락와 화장하는 날 어머니를 수목장으로 모셨다. 수목장을 하고 정해진 날들이 지나면 다른 분들로 채워진다고 한다. 그곳 수목장은 잠시 있는 것이지 영구히 기릴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어머니께 효도의 근처도 정말 가지 못하고 살면서 기쁨이 되어드리지 못하며 평상시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으면서도 장례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늘 마음에 남아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른 어머니였다.
요즘 무빈소 장례, 장례의식의 간소화 등이 자주 언급된다. 과거와 달리 변해가는 장례문화를 생각하며 시신기증도 한 사람의 삶을 마무리하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