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지난해 회사에 재입사하고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쨌든 회사에 새로 입사하면 정부 방침 때문에 비자도 1년짜리만 발급받았고, 그 1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몰랐다. 한 주주의 친동생인 전대표의 방만한 경영으로 제품의 품질과 서비스의 수준낮은 대응으로 인하여, 매출은 예전의 20% 수준까지 줄어들어 있었지만 임직원은 무려 회사가 잘 나갈때 채용을 늘린 200여명에 가까웠다. 사실 나는 이 회사에 네번이나 재입사를 했다. 전 세계에 지사가 워낙 많다 보니 내가 그만둔 사실조차 모르거나 내가 다시 들어온 줄도 모르는 무관심한 동료들도 있었다. 암튼 내가 떠나면서 용케 기회를 잡은 녀석들도 있었고, 내가 다시 돌아 오면서 기회를 다시 잡으려는 직원들의 눈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살아남고 누가 도태될까? 나는 줄곧 우리 직원들이 감정을 배제하고 눈칫밥이 필요없는 회사를 만들테니, 오로지 실력으로 살아남길 원한다.
나는 이 회사를 떠날 때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명함도 버리고 이메일도 지워버리고, 함께 찍은 사진들까지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었다. 아예 이 회사의 경력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박터지게 주주들과 싸우고 회사를 뛰쳐 나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이 회사에 와 있었다. 아이러니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다시 채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과 평범하게 잘 지내고 돈 문제 없다. 한마디로 비리가 없다는 것, 그 이유 하나였다. 사실 나는 재 입사하면서 이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동생이나 학교동기들에게 거래를 끊던가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혈연, 지연을 이용하여 우리회사와 거래하는 자체를 극도로 혐오했다. 병인가? 또라이? 가격과 품질로 정상적인 절차를 통하여 승인을 받고 거래하기를 바랬다. 결국 내 동생은 내가 대표로 있는 이 회사에서 나의 무언의 압력으로 구매부서가 오더를 안 주면서 거래가 끊겼고 동생은 나를 '악마' 라고 부르면서 한 동안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어떤 주주는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꼭 필요할 때 써먹는 히든카드. 나는 팀을 이뤄 제품을 개선, 개발하고 테스트해서 판매할 수 있는 최상의 제품으로 만드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주들이 보는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신규 업체 개발, 까다로운 고객 미팅, 악성 미수금 업체 처리, 고객 컴플레인 대응, 행사진행등 잘 해야 본전같은, 그리고 내 업무를 하면서 이런 단발성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그들은 나를 그렇게 사용했다. 어떤 때는 정말 개처럼 부려먹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고객 접대나 고객을 설득하는 일, 사탕발림 같은 일은 내가 천부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을 꿈꾸곤 했다.
하늘 높이 솟은 살랑살랑 그늘을 만든 느티나무 아래 나무 벤치가 있고, 터질 듯한 실크 코르셋과 엘리스 치마를 입고 하이디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장면. 나는 그녀에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주며 미래를 이야기한다. 여인의 가녀린 손가락으로 부러질듯 월광소나타가 들리고, 삼류소설작가가 된 나는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은 잔디밭 정원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웃는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면 잠시나마 세상이 평온해진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2016년 5월, 나는 회사에 재입사하자마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백여명 중 팔십명을 해고하는 결정이었다. 첫 번째 대상은 간접부서의 간부 직원들이었다. 구매, 자재, 회계, 관리, 영업관리 등 이름만 번듯한 간부들이 너무 많았다. 두 번째 대상은 각 부서의 간부들이었다. 특히 관리부는 이사, 부장, 차장, 과장으로 이어지는 철밥통 구조였는데 실제 일을 처리하는 직원은 사원 세 명뿐이었다. 나는 80명을 당일 해고했다. 대신 법적으로 지급해야 하는 조건에 몇 개월치 급여를 더 얹어주었다. 돈에 민감한 까다로운 주주들이었지만 동의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구매 인력을 줄이는 대신 생산 인력을 늘려 외주 가공 비용을 줄였고, 간접 인력도 대폭 축소했다. 부서 구조도 간단하게 정리했다. 행정, 영업, 생산, 품질 네 개 부서로 통합하여 간부율을 20%이내로 줄였다. 그때부터 회사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출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고, 영업 과장을 이사로 승진시키는 미친짓도 단행했으며, 모든 부서에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수금액의 일정 비율을 당월 급여에 포함시키는 방식이었다. 그 동안 회사의 방만한 경영에 실망해서 떠났던 직원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환영했다. 근처의 작은 계열사들도 우리 회사로 통합했다. 여섯 개 회사로 흩어져 있던 조직이 두 개 회사로 줄어들면서 인건비와 부대 비용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회사는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연말에 대형 음식점을 빌려 종무식과 식사를 하면서, 연말 보너스를 받고 끝내 울어버리는 직원들과 껴안고 나도 함께 울었다. 예쁜 여직원들이 내 눈물을 닦아주어서 더 울었다. 주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끝까지 약속을 지켜준 주주에게도 나는 감사했다.
2017년 5월 어느 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다시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 관리부 직원과 함께 비자 발급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외국인 전용 병원에 갔다. 병원 건물은 허접했고 의료 장비들도 빛이 바랜 오래된 기기들이 방마다 놓여 있었다. 저것들이 작동은 제대로 되나... 속으로 생각했다. 한쪽이 가라앉은 침대에 누워 배를 까고 드러낸 채 검사를 받았고 엑스레이도 찍었다. 나는 해모포비아가 있다. 피를 보면 어지러워지는 병이다. 그래서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를 다 뽑았다고 내 팔을 툭 치는 바람에 겨우 눈을 떴다. 정신이 몽롱했다. 눈앞에는 마스크를 쓴 중년의 여자 의사가 앉아 있었고 내 시선을 따라 움직이며 웃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 직원들은 침착했고 친절했다. 일주일 후 여직원이 신체검사 결과를 받아왔다. 내 사무실 유리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그녀는 말없이 엑스레이 필름을 내 앞에 펼쳤다. 내 복부 오른쪽에 500원짜리 동전보다 더 큰 검은 점이 보였다. 순간 머릿속이 하해졌다. 이게 뭘까. 무섭다...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 나는 내 옆구리 그 쪽을 손으로 간만히 눌러본다... 내가 이제 죽는 건가. 아직도 생사가 불분명한 어린 시절 여자친구들도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여직원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다음 날 병원으로 가서 그 필름을 의사에게 보여주며 이 큰 점이 뭐냐고 물었다. 의사는 필름을 대충 보더니 단 두 글자를 말했다. 没事. 괜찮다는 말이었다.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의사는 이미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동안 아내 몰래 숨겨두었던 비자금과 통장, 비밀번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골 엄마에게 매달 몰래 보내주던 일정액을 한꺼번에 큰 돈으로 이체를 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아내의 더럽게 껍씹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디릭디릭 ... 데니 너 죽고 싶니' 피아노는 고사하고 서울 고모가 보내준 이천원짜리 누런 오리가 그려진 파자마만 일년내내 입는 아내가 싫다.
나는 술과 담배를 끊었다. 나는 사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회사로 찾아오는 고객 접대, 신규 업체 개발, 각종 회식 때문에 술과 담배는 항상 함께였다. 회사는 바빴고 나는 늘 그 중심에 있었다. 두 달 뒤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보 사랑해 라고만 말했다. 엑스레이 필름도 보여주지 않았다. 수원 성빈센트 병원 진료실. 떨린다.... 3개월밖에 못살아요.... 나에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를 잉태하고 세상에 나오게 고생한 우리 엄마, 그리고 성인이 될때까지 뒷바라지 해준 엄마, 아빠.... 그리고 나의 스트레스를 모두 받아준 밥 많이 먹는 내동생에게 감사하고, 나와 별로 친하진 않지만 장남인 날라리 나의 형, 그리고 오토바이와 결혼한 매형과 이혼하고 젊은 오빠 만나 잘 사는 이삿짐 회사 대표인 큰 누나, 전국 서점에 책을 운송하지만 책을 한번도 읽어본적이 없다는 매형과 사는 글 잘쓰는 우리 둘째 누나, 빠마 머리에 한곡 더 부르겠다고 마이크 땜에 맨날 서로 싸우는 예쁜세째, 그리고 철부지 막내 누나.... 용돈은 이제 끝이에요...
남만의 바다 끝 ... 지중해의 동쪽 .... 도모오 성당, 세상에서 가장 슾픈 막달라 마리아가 있는 피렌체로 떠날것이다. 14세기 르네상스를 시대를 빛냈던 수많은 천재들이 나왔던 그 도시로 .. 나도 천재일지 모르니... 단테, 미켈란젤로, 다빈치..... 나는 먼저 권선동의 작은 동네병원에 예약을 하고, 진찰을 받고 빈센트 병원으로 진료를 의뢰받았다. 작은병원에서는 중국에서 찍은 필름은 보여주지 않았다. 빈센트는 믿을 만 하겠지... 나의 병명은 무엇인가? 잦은 음주가 결국 나를 죽음으로 몰아서는구나.... 의사는 새로 찍은 엑스레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몸에 이상이 없는데요.. '오히려 아주 좋은데요. 나는 당황했다. 선생님, 이건 중국에서 찍은 엑스레이인데요. 나는 서류 가방에서 필름을 빼서 위사 선생님께 건넸다. 의사는 그 필름을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거 식사하고 찍어서 이렇게 나온 겁니다. 장을 비워야 하는데 그건 장의 위치로 볼 때 음식이나 변이에요. '중국에서는 그냥 찍나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희망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의사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두 달 동안 담배를 끊은 상태였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나는 간부 몇 명에게 모바일로 5000위안씩 여러명에게 송금했다. 한국돈으로 500만원은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말했다. 내가 1년 안에 담배 한 개비라도 피우면 이 돈은 당신들의 차지요. 직원들은 환호했다. 사장님, 불가능한 약속 하시네. 나는 그 돈을 못 받더라도 담배를 끊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영업사원들이 나를 계속 유혹했다. 술집 마담은 도넛까지 만들어 약 올렸다. 담배 키스 어때? 나는 캔디를 쪽쪽 빨며 버텼다.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었고 전 직원 산행이 있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갔을 때 직원들이 대형 프랭카드를 들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담배를 끊은 사장님의 용기에 감사합니다. 프랭카드엔 "데니 사장님의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중국어로 적혀 있었다.. 나는 사실 용기도 없었고, 그냥 용케 살아 있으니 버티고 있는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보냈던 그 돈을 현금으로 바꿔 정성스럽게 돌려주었다. 나는 또 울었다. 그해부터 나는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려 8년동안 했다. 어느날은 팔굽혀 펴기 하는 내 등을 타고 웃어대는 우리 아이들이 고맙기도 하고 횟수를 세주는 아내가 고맙기도 했다. 수영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테니스, 배드민턴, 축구, 산악회에도 참여했다. 결국 철인 3종 경기에도 도전했다. 수영하다가 낚시 그물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하고, 달리다가 족저근막염땜에 고생하기도 했고, 자전거를 타다가 하천으로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아내는 회사에 그렇게 개처럼 충성하더니 갑자기 미친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담배를 끊은지도 모른다. 내가 담배를 끊었다고 하니, 아내는 '언제 담배폈어?' '냄새는 직원들이 펴서 옷에 베긴거 아니었어?' 사실 나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태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담배 하나 꼴아봐.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품앗이등 하러 나가시면 받아오시는것 같았고, 집 찬장에는 담배가 보루째 쌓여 있었다. 형이 한 보루, 내가 한 보루. 땡땡 언 하드나 좋아하는 중1인 동생은 아직 어려서 빼고 찬장에 담배가 쌓일때마다 서둘러 담배를 챙겼다. 배에 숨기고 고개를 숙인 채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동네 담벼락 기와 사이에 숨겨두고 춘식이와 도넛을 만들어 먹으며 담배를 피웠다.
내가 죽을때..... 꼭 한대 피우고 싶다... 유언은 때려치우고 애들아 ... 아빠가 임종시 .... 담배와 라이타는 꼭 챙겨오거라... |